레트로의 심리학 : 인류는 언제부터 ‘그리움’을 품었나

 

이미 역사 이래로 수많은 철학자와 사상가들이 말한 인간의 특징은 상상과 추상이다.이 상상과 추상의 힘은 호모 사피엔스의 유일한 강점이었고 그렇게 인류의 문명과 문화는 발전해 왔다. 눈 앞에 보이는 물건을 보고 그와 비슷한 다른 물건을 은유해내고, 그 물건의 용도를 생각하면서 더 많은 다른 용도를 떠올렸다. 어디 그 뿐인가? 용도와 용도의 관계를 생각하면서, 사물의 쓰임뿐만이 아니라 사건과 상황의 이치와 관계까지 추상하게 된 것이 바로 인간이다. 하라리가 자신의 책, <사피엔스>에서 말한 것처럼 인간이 오늘날 지구의 전 역사를 지배한 결정적인 힘은 바로 ‘상상’의 힘이었다.

종교도 이러한 의식 체계의 산물이다. 자연의 변화, 나타났다 사라지는 인간의 존재적 변화를 체감한 인류는 미지의 존재에 대한 두려움과 경외심 뿐만 아니라 자신이 애착했던 대상에 대한 그리움을 가졌다. 마음에 담은 그리움을 가지고 그림을 그렸다. 그리움의 대상과 함께 했던 상황과 사건을 떠올리면서 춤을 추었다. 그들과 나눈 소통의 기억을 떠올리면서 일종의 표현을 남겼다. 그 표현은 오늘날의 문자가 발명되기 전에는 앞서 말한 그림이나 표식 또는 전승가능한 몸동작이었을 것이다.

인류는 역사시대에 들어오면서 그리움을 현상화했고 그리움을 표현하는 행위를 형식화했다. 인류가 탄생한 것은 기원전 5만년경으로 알려져 있다. 인류학자들은 인류사를 통틀어 지구상에 태어났다가 사라진 인구수를 무려 1천 82억명으로 추산한다. 이렇게 많은 인류가 우리가 지금 살고 있는 지구를 거쳐갔음에도 그 수많은 존재들의 흔적은 거의 남아있지 않다. 선사시대는 물론이거니와 역사 이후의 시대에 남은 것은 왕과 귀족, 역사적 인물에 대한 증거만이 보존되고 있을 뿐이다.

하지만 떠올려 보라. 당신이 2천 년 전, 이집트 나일강 유역에 살고 있는 젊은 남성이었다고 말이다.사랑하는 마을의 여인이 로마제국 기병단 소속 백부장의 노예로 끌려갔고 죽음을 맞았다고 가정해 보자. 당신은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에서 일했던 사서로 당시의 이집트 언어는 물론 헬라어와 고대 아람어까지 표현할 줄 아는 사람이다. 어떻게 했을까? 아마도 모진 고통을 당하며 로마로 끌려가는 길에 죽음에 이른 여인을 생각하며 애도의 시라도 남기지 않았을까? 어쩌면 복받치는 그리움과 탄식 속에서 인생 내내 수많은 그리움의 결과들을 만들어냈을지 모른다. 길가메시의 서사시보다 더 장고한 필력이었을지 모르며, 솔로몬의 아가서에 담긴 연정 이상의 글들을 쏟아냈을 수 있었을지 모른다.

이집트의 왕, 프톨레마이오스가 재위하던 AD 10년 까지만해도 이집트의 백성들은 말은 할 수 있었지만 상형문자를 쓸 수 없었다. 문자와 서필은 오로지 왕과 귀족의 고유권한이었다. 권력은 철저하게 민중의 문자 사용을 차단했다. 그리하여 지금으로부터 먼 옛날 고대의 서사들은 왕과 귀족에 대한 종교적 그리움, 신에 대한 외경, 신과 인간의 관계에 대한 서사들이 주를 이룬다. 수많은 개인들이 ‘그땐 그랬었지’라며 모종의 그리움과 추상의 행위들을 했었겠지만 그들이 그 깊은 마음을 담아낼 수도 없었고 보존할 힘도 없었다.

과연 옛날에는 흘러간 시대에 대한 동시대적 추상이 가능했을까?

그리움이라고 하는 것은 내가 살아왔던 시대의 흐름 속에서 내가 겪었던 어떠한 때를 생각하는 추상의 사고다. 사고의 주체가 태어나기 전의 사건과 상황을 떠올리고 이를 구체적으로 표현한다고 해서 그 사고행위를 그리움이라고 말할 수 없다. 공자와 맹자가 제자들을 모아 놓고 예와 의를 가르칠 때 요순시대의 풍요를 이야기한다고 그것을 그리움이라 말할 수 없는 이치다.  그것은 역사적 추상에 지나지 않는다. 그리움은 개인적인 동시대의 추상이다. 살아온 어느 때를 추억하는 것이다. 그리움은 나 뿐만이 아니라 나와 소통한 대상들과의 관계의 경험에 근간한다. 그리고 이 그리움은 동시대 속에서 어떠한 외부적 환경의 변화, 상황의 격변의 경험이 수반되어야만 한다. 그리고 그리움을 통해 반드시 현재에 딛고 있는 나의 존재적 가치보다 어떤 면에서 더 나은 모습을 현재화시키는 생각의 과정이다.

임진왜란이 발발한 1592년에 장가를 든 한 마을의 청년이 있다. 이 청년은 과거시험을 준비하다 말고 전국의 전장을 누비며 왜군과 싸우다가,  붙은 목숨을 달래며 겨우 고향으로 돌아왔다. 서른 중반에 병자호란을 겪었다. 사십대에 이르러서는 정유재란이 터져 북쪽의 오랑캐들과 싸웠다. 이러한 그에게 피비린내나던 스물 몇해의 삶을 쪼개고 쪼개었을 때 순간 순간에 그리움의 기억이 있었을까? 아니었을거다. 생각할 수록 아팠을 것이다. 다시는 되뇌이고 싶지 않은 과거의 기억들로 가득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런 그에게 그 전란의 아비규환 속에서 사랑과 우정의 기억, 치유와 회복의 경험이 있었다면 그는 그 엄혹한 시간의 흐름 속에서 끝까지 주어진 이생의 삶을 붙들 힘이 있었겠으리라.

그리움이 커지고 그것이 켜켜이 쌓이면 한이 된다. 회복과 치유의 과정이 없으면, 즉 안정화된 삶의 환경이 없이 여전히 삶의 외연과 내연이 수많은 갈등과 침입, 전쟁과 재난, 사고로 점철된다면 인간은 그리움을 표현하지도 그리움의 정서를 표출하지도 못하는 마음의 상황에 놓이고 만다. 우리는 이 마음의 상황, 또는 이 마음의 정서를 ‘한’의 정서라 불렀다. 본질적으로 기억하고 추상해내는 대상과 상황은 긍정적일 수 있으나 그러한 대상과 상황이 단절되는 경험이다. 국가와 지역사회의 붕괴, 빈곤의 연속, 소중한 가족과 이웃의 죽음이 연속되는 삶 속에서는 도저히 ‘그리움’이라는 것은 나와 타인에게도 용인될 여유가 없었을 것이다.

1905년 프랑스의 만국박람회에 참석한 미국 뉴욕의 어떤 신문사 기자는 연일 계속되는 박람회 군중의 함성을 뒤로하고 세느강 한 켠의 카페테리아 테라스에서 커피를 마시며 에펠탑이 치솟은 하늘에 가득한 비행선들을 보면서,이렇게 말했다. ‘앞으로 유럽이 어떻게 바뀔지 모르겠다. 불과 수십년 안에 비행기가 하늘에 가득할 것이고, 역사의 도시 파리는 풍요와 번영의 도시로 탈바꿈할 것이다. 몽마르뜨 언덕의 화가들이 시골마을로 쫒겨날지 모른다. 고풍스러운 파리의 건축물들이 뉴욕의 철강 건물로 바뀔지 모른다. 급변해가 가는 유럽 최고의 문화도시 파리의 모습을 보면서 그가 몹시도 그리워한 것은 자신의 고향 뉴저지의 목가적 풍경이었다. 그가 다녔던 하버드 대학을 가로지르는 캠브리지 강가의 조정 경기장면이었다. 최고의 대우를 받으며 파리로 건너와 타블로이드판 신문에 세계만국박람회 특집기사를 쓰는 최고의 영예를 누리고 있는 그였지만 그가 그리워한 모습은 당시 자신이 체험하고 있는 인생 최고의 경험과 상반된 자신의 학창시절 경험, 옛 농장마을의 추억들이었다.

오늘의 내가 적어도 평탄한 삶을 살고 있다면, 그리움은 그 자체로 낭만적 그리움이다. 오늘날 우리가 가슴 속에 떠올리는 그리움의 추상은 대부분 낭만적일 것이다. 하지만 역시 우리 한국인들에게 그리움은 사치였는지도 모른다. 오늘날 대한민국의 동시대를 살고 있는 사람들이 거친 한국의 시대는 구한말에서 일제강점기, 정부수립 후의 빠른 산업화와 군부독재시기, 대중문화기와 IMF 구제금융, 경제위기 속에서의 후기산업사회, 인터넷과 소셜네트워크를 포함한 4차 산업혁명기다. 얼마나 빠르고 다양한 변화들이 있었겠는가?

다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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