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7년, 혜은이는 왜 그 시대의 아이콘이 되었는가?

1977년, 혜은이는 왜 그 시대의 아이콘이 되었는가?

 

1977년 봄, MBC 문화방송에서 10대 가수상 프로그램이 열렸다. 남진, 나훈아, 패티김 등 당대의 내로라하는 가수들이 대거 참여했다. 조금만 과장해서 이야기한다면, 오늘날의 쇼프로 무대에 버금갈 정도로 백스테이지와 댄서들의 복장은 화려했다.

전 국민, 각 가정에게 흑백TV가 널리 보급되던 시기라 가수들은 목소리 뿐만 아니라 표정과 춤사위에 더욱 신경을 썼다. 제주도출신 2남 2녀의 셋째, 초등학교 때부터 발레를 했다는 앳된 여자가수의 외모와 몸동작은 당시의 또래 가수들과 사뭇 달랐다.

혜은이 차례가 왔다. 십여 명의 백댄서들이 등장하기 전, 혜은이가 무대 중앙으로 나가 섰다. 스텝을 옮기며 탭댄스 모드로 바꿀 무렵, 그녀는 그망 꽈당하고 바닥에 미끄러 넘어지고 말았다. 하지만 당황한 기색 없이, 호소력 짙은 목소리로 <진짜 진짜 좋아해>를 열창하기 시작했다.

미국의 미소녀 브렌다 리(Brenda Lee)의 미성보다 더 감미로왔다. 올리비아 핫세만큼이나 부드럽고 세련된 표정에서 나오는 그녀의 목소리가 동시대 젊은이들의 마음을 흔들었다.

사랑과 인생의 심연으로 빠져드는, 가사의 깊은 울림은 반전 또 반전이었다. 연인을 향한 격한 애욕을 벗어나 먼 발치에서 기다리고 염원하는 사랑의 마음이 거리 곳곳의 투박한 앰프와 스피커를 적셨다.

오늘날 걸그룹 아이돌스타와 비교해도 손색이 없는 음색과 외모!

혜은이는 신중현류의 포크록, 이장희로 대별되는 통키타 신드롬, 나훈아와 이미자의 트롯, 패티김의 엘리건트 송과 다른 한 켠에서 코리안 엘리지 팝(Korean Ellegi-Pop)라는 장르를 열었다.

박정희 유신 정권의 탄압으로 상당수 인기 가수들이 음반의 검열과 대마초 스캔들로 활동을 중지했던 시기라 혜은이의 데뷔와 인기는 그 공백을 유감없이 채웠다.

비판과 시샘이 없지는 않았으리라. 혜은이의 노래에는 직접적이든 우회적이든 저항의 정신이란 것은 없었으니까. 이상화의 시,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에 나오는 무명 시인의 애절한 사랑과 연민이 대부분이었을테니까…

울며 울며 날으는 갈매기여

수평선 아득한 곳에

계시는 내 님에게 말해 주오.

당신만을 사랑해. 정말 정말 사랑해.

혜은이, 그래도 당시의 국민들에게 사랑을 말할 수 있는 방법, 사랑을 마음 속에 키울 수 있는 법을 알려준 것임에 틀림없다.

 

어둠 속에서 한참을 울었어

사랑하고 싶어서, 사랑받고 싶어서

 

<혜은이>

1954년  제주도 제주시에서 《낙랑쇼》의 단장이자 유명 변사였던 김성택의 딸로 태어나 7살 때 충청남도 대전시 선화동으로 이주하여 그곳에서 자랐다.

1975년 〈당신은 모르실 거야-길옥윤〉로 가요계에 데뷔하여 폭발적인 가창력과 미모로 혜은이 신드롬을 일어났다 1977년에는 2집 <진짜 진짜 좋아해>(동명 영화 OST|문여송/길옥윤), 3집 <당신만을 사랑해>(동명 영화 OST(1978)|길옥윤)가 모두 히트하면서 인기 정상에 올랐다.

10대 가수상, 가수왕, 최고 인기가수상 등 3사 통합 가수왕을 수상했고 혜은이 신드롬을 일으키며 패션의 선두주자로 명실공히 대한민국 최고의 아이콘이 되었다. 또한 1집부터 14집까지의 모든 타이틀곡이 1위를 했다.

데뷔 앨범과 연달아 발표한 2개의 앨범이 히트를 기록했지만 아직 혜은이는 원래 가수를 할 생각이 없었고, 아버지가 보증을 서주셨다가 잘못돼서 길에 쫓겨나서 이에 대한 방책으로 어쩔 수 없이 마이크를 잡았다 한다.

1977년 일본 ‘야마하가요제’에 출전한 그녀는 일본 빅터 레코드사에서 영입 제안을 받기도 했다. ‘당신만을 사랑해’를 일본어로 내고 조용필에 앞서 일본 활동도 짧게 했다. 당시 일본에선 ‘강코쿠(한국)노 아이도르’로 소개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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